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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장기/배낭여행(2018-2019)

[일기] 2018.11.28 병원, 신발, 과식

by 해바라기 씨 2022. 2. 17.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미친듯이 내리고 있었다. 거리가 하얗게 변해 있는 것을 보니 걱정이 앞섰다. 열 시 반에 병원 예약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홉 시 반에는 맞추어 일어나려고 했는데, 긴장이 됐는지 아홉 시부터 눈을 떠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외국에서 병원을 가는 것은 처음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돈이 얼마나 나올지 몰랐으니까. 결국 전 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마쳐서 숙소를 나왔다.

눈은 계속 내리는데 길이 철벅거린다. 최악의 상황.

 온 도보가 눈에 덮여 있었다. 지도상 병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보였다. 직진 동선이 대부분이어서 출발할 때만 해도 걱정이 없었다. 걱정했어야 했다. 바람이 무척이나 셌고, 눈이 그칠 것 같더니 그치지 않고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모자도 쓰고 장갑과 목도리까지 착용했는데도 추위가 직물을 비집고 들어왔다. 게다가 가는 길 중간부터는 눈 녹은 부분을 밟았는지 신발이 스멀스멀 젖어오기 시작했다. 곧이어 양말도 푹 젖었다. 체념하고 그냥 걷다 보니 걸을 때마다 스펀지 짜는 소리가 났다. 수면양말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서부터 신고 온 운동화는 가볍도 발도 덜 아프지만 여름용이라 얇아서 추위에는 쥐약이었다. 걷는 동안 미칠 것 같았다.

 

 설상가상으로 병원 건물을 찾지 못해 그 앞을 몇십 분이나 뱅뱅 돌았다. 병을 고치려는 건지, 병을 얻어 가려는 건지... 같은 길을 우왕좌왕하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가면서 나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다른 건물을 세 번이나 들어갔다 와서야 병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이 순간만 해도 숙소에서 일찍 나온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딱히 그렇지 못했다. 예약한 의사가 아직 출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뭔.. 뭐시기 병원

 망연자실하고 완전히 지친 채로 대기석에 앉아 한 시간 반을 더 기다려야 했다. 차디찬 물기를 가득 머금은 내 발은 데워질 생각이 없었다. 슬그머니 신발을 벗어 보았지만 양말이 다 젖은 채라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거기서 유일한 동양인인 나는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고 나는 미친 척 양말까지 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드디어 의사가 도착했고 나는 첫 번째 순서도 아니었기에 그 앞에서 다리를 떨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한참 지나서 내 순서가 왔지만 가정의학과 진료가 보통 그렇듯 별 게 없었다. 증상을 영어로 얘기하자 의사도 영어로 간단한 질문을 했고, 소변을 채취해서 검사실에 넘겼다. 작은 병원 같았는데 의과대학 실험실 한쪽에 있는 기본장비 같은 것들이 따로 있는게 신기했다. 소변검사 결과가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건 신기한 걸 넘어 충격이었다. 대체 뭘 얼마나 알아내겠다고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건지. 의사가 방광염이 예상된다고 했는데, 그러면 대장균 검출이나 염증 수치만 확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날 진료에 307레이를 지불했고 소변검사 결과를 직접 들아야 되기 때문에(이메일이나 전화로는 불가하단다) 일주일 뒤에 또 와야 한다. 약값으로 60레이를 또 냈다. 거의 10만 원... 짜증이 올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제발 여행자보험사에서 보장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돌아오는 길 역시 고역이었다.또 길을 헤매서, 가던 길과 다른 곳으로 걸어왔다. 큰 길을 건너려는데 여기 차들이 너무 쌩쌩 달리는 게 무서워 지하도로 들어간 것이 잘못이었다. 기껏 들어갔더니 막혀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 나와야 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진지는 한참 되었다.

 

 한 가지 좋았던 점은 돌아오는 길에 루마니아식(?) 패스트푸드점에서 먹을 것을 포장해 왔다는 점 정도. 배가 너무 고팠지만 그것보다는 발가락 통증을 달래는 게 더 시급했으므로 숙소로 들어오자마자 양말을 벗어던지고 화장실로 직행했다. 찬물이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로 발이 얼어 있었다.

 

 그렇게 한바탕 푸닥거리를 한 후 포장해 온 점심을 먹었다. 흐드러지는 쌀밥 위로 시큼하고 묽은 닭도리탕 맛이 나는 요리가 얹어진 음식이었다. 수프도 맵지 않은 김치찌개 맛이 났다. 먹을 만했다. 적어도 따뜻하니까. 수프 안에 미역 비슷한 채소와 약간의 고기가 있었다. 열심히 먹는 중에 청소하러 온 로나 씨를 만나 음식의 이름을 물었다. 당연히 나는 기억하거나 알아듣거나 할 수 없어서 핸드폰에 필기로 적어달라고(노트9이다) 부탁했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로나는 굉장히 좋아하며 적어주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나도 한 시쯤이었고, 나는 배가 매우 부른 상태로 침대에서 한참을 졸았다. 거의 몇 시간은 잔 것 같다. 팅팅 부은 얼굴로 숙소를 어슬렁거리다가, 눈이 멈추자 바깥으로 나왔다. 해가 져 있었다.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원초적인 욕구를 채우고자 일단 저녁을 먹기로 했다.

무슨 하루가 잠깐 나갔다가 먹는 것밖에 없어...
라면 대신 선택한 피자 한 판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근처에 있다고 구글에 뜨길래 가서 돈을 좀 썼다. 맛없는 스테이크를 먹고 나니까 얼큰한 라면이나 국밥이 땡겼다. 어쩔 수 없이 피자 한 판을 포장해서 숙소로 가져와야 했다. 숙소 휴게실에 있는 스마트TV로 유튜브를 보면서 한 판을 전부 해치웠다. 돼지가 되려나... 여행을 하면 살이 빠진다기에 그것만 믿고 일단 먹는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영국에서 굶주렸던 걸 생각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니까...

 

 배가 정말, 정말 불렀다. 다 먹고 난 순간엔 조금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