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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장기/배낭여행(2018-2019)

[일기] 2018.11.14 터널 속 버스, 한인 민박

by 해바라기 씨 2020. 5. 26.

 

새벽같이 나와 체크아웃을 하고 우버를 탔다. 새벽에도 도로가 자동차로 가득 찼다. 파니니를 하나 사고 한참 앉아 기다리는데, 낌새가 이상해 전광판을 다시 보자 플랫폼이 다른 곳이었다. 10분 전에 차를 탔다. 사람은 반 밖에 차지 않았다.

런던에서 한참을 벗어났다. 거의 2시간을 달리고 나서야 세관에 도착했고, 영국을 나가는 건 정말 간단했다. 기계에 여권을 찍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면 끝이었다. 다시 출발할 때까지 체감상 3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제 페리에 내가 타고 있는 버스를 싣나 싶었는데 전깃줄 같은 것들이 매우 복잡하게 늘어져 있고 이쪽저쪽 찻길이 얼기설기 나눠져 있는 곳으로 들어섰고, 곧 차체보다 조금 큰 것 같은 컨테이너에 버스가 쏘옥 들어갔다. 차가 서자 바로 앞에 있는 다른 버스도 보였다. 마치 직사각형 종이상자에 카스텔라 빵이 딱 맞게 들어간 모양새였다. 이게 뭔가 생각하고 있는데, 천천히 차체가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버스 창문으로 내다보니 컨테이너의 아래쪽에 작은 창이 나있었고, 그 밖으로 풍경이 휙휙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탄 이 버스가 지금 기차 화물칸에 실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재밌었다. 컨테이너 벽면에는 전광판이 있었는데 거기서는 '지금 유로터널을 지나는 중이니 걱정 마세요 곧 달릴 겁니다'라는 안내 멘트가 지나갔다. 터널을 지나는 시간은 기차라 그런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대략 1시간쯤이었다. 틈틈이 구글 지도로 내 위치를 확인했다. 프랑스 본토에 닿자마자 버스는 기차에서 내렸고 그 후 3시간은 더 달렸다. 바깥은 온통 시골 풍경뿐이었다.

 

난 지금 기차 안의 버스 안에 있어

 

릴랙스,

 

가는 동안 뒷자리 남자가 친구와 연락을 해야 된다며 데이터를 두 번이나 부탁했다. 딱히 급해 보이지도 않았고 처음엔 거의 5분 정도 켜줬다. 그가 두 번째로 부탁을 했을 때에는 뭐지; 신종 사기인가 싶었지만 그냥 켜줬다. 그 후로는 별말이 없었고 그냥 입 냄새가 좀 났다.

도착해서 내린 곳은 Bercy 터미널이었다. 유명한 곳은 아니었고 버스가 많이 다니는 곳 같았다. 주변에 메트로가 있긴 했는데 처음엔 찾지 못했다. 무작정 차고지를 빠져나와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지만 사람들보다는 차가 더 많이 다니는 도로여서 우두커니 핸드폰을 보고 있는 게 조금 무서웠다. 파리의 악명은 그 어느 도시보다도 높았으니까. 나랑 어떤 미국인 여자애랑(나중에 통성명했다) 그렇게 길가에 서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어떤 아저씨가 메트로로 갈 거면 데려다준다고 말했다. 어차피 큰 길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면서(속으로 많은 도망 루트를 생각했다, 의심 갑) 그를 따라갔다. 미국인 여학생은 교육학을 공부하고 있다고 했고, 프랑스어는 전혀 모른다고 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역에서 나비고를 샀고, 셋이서 가는 방향도 같아서 중간까지는 같이 동행했다. 마음이 놓였다.

숙소까지 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역에서도 매우 가까운 한인 민박이다. 안경 쓴 남자 직원이 나를 맞이했다. 어려 보이는 여자분도 있었다. 직원은 내게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일찍 도착해서 별로 피곤하진 않았지만 일단 씻었다. 화장실은 그저 그랬다. 같은 방에 있던, 아까 봤던 여자분은 스무 살이고, 여기서 한 달 살기를 하고 있단다. 재밌어 보이기도 했지만 무료해 보이기도 했다. 이름은 Y였다. 친절하게도 마트까지 나를 데려다주었다.

 

이곳은 아침 점심을 한식으로 제공해 주는 데다 숙박비도 그것을 감안하면 매우 싼 곳이다. 식사 시간이 되면 담당 아주머니가 식사 준비가 되었다고 말씀해주신다. 식당 겸 거실로 내려가니 투숙객들로 붐볐다. 음식은 가짓수도 많고 맛있었다. 아주머니가 중국 분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오묘한 시큼 매콤함이 있었지만 익숙한 음식이었고, 추운 날씨에 뜨끈한 국물 요리를 먹을 수 있어서 온 위장이 만족스러워했다.

이 숙소의 특징 중 하나는 해피 아워라고, 매일 밤 아홉시부터 열두시까지 와인 4병을 투숙객들에게 무료로 제공한다. 오랜만에 친목도 하고 싶어서 거실로 내려갔다. 사람이 꽤 있었다.

 

처음에 안내해준 낮 담당 스텝 H 씨, 저녁 담당 스텝인 L 씨, 쌍둥이인 언니들 K와 E, 친구끼리 온 두 남자분이 있었다. 자매분들은 어려서부터 중동에 부모님과 살았고 국제 학교를 다녔으며, 지금은 워싱턴에서 산다고 했다. 언니는 직장인이고. 둘은 분위기가 다른데, 언니는 똑 부러지게 보였고 동생은 다정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 자매 중 언니분이 갑자기 딱딱하게 어떻게 오셨어요, 하며 자기소개를 요구(?)했을 땐 되게 당황했는데 나중에 보니 그냥 나를 대화에 끼워주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분이었다. 두 분 다 너무 재밌고 따뜻했다. H 씨는 여행자인데 여기서 잠시 일하는 중이라고 했고, L 씨는 어리지만 프랑스에서 혼자 영화 공부를 하려고 어학원을 다니며 민박에서 일하고 있었다. L 씨를 보면서 내 동생 생각을 했다. 그놈도 의젓하게 살면서 자기 몫을 했으면 좋겠는데... 해피 아워는 즐거웠다. 다 같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열두시가 다 되었다.

내가 아직 내일 일정을 정하지 않았다고 하니 K 언니가 같이 베르사유에 가자고 했다. 나는 기뻤고, 내일 아침식사 후 만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