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2018.11.16~17 인종차별, 기분전환
오늘은 혼자 나왔다.
아니다, 다른 한 분과 같이 샹젤리제 거리로 나왔다. 거기서 쭉 거리를 따라 개선문으로 걸어갔다. 뭔가 이야기를 나눴는데 무슨 소린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냥 서로 어색해서 그 어색함을 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개선문에서 헤어졌고 나는 계속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중간에 작은 카페에서 크루아상과 에스프레소 콘파냐를 먹었다. 먹을 만했다. 미술관 쪽으로 올라가다 보니 넓은 광장까지 다다랐고, 거기서 에펠탑이 딱 보였다. 정말 좋은 위치였는데... 안개가 자욱해서 탑의 윗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웃으며 사진을 열심히 찍었다.
춥고 배고파서 여기유럽에서 산 지도에 나와있는 맛집에 찾아갔다. 이곳에서 최악의 인종차별을 만났다.
식당은 좋았다.
들어가서 봉주, 인사했고 직원이 나와 친절하게 식사냐, 한 명이냐 라고 묻는 것 같아 손가락으로 원 퍼슨, 대답했다. 그때 옆에 웬 잘 차려입은 예쁜 할머니가 내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왜 당신은 영어를 쓰냐, 프렌치를 써야지 라는 말이었다. 이게 뭔가 싶었는데 그냥 나도 안다, 노력 중이다 라고만 대답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더 고상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기라면 그 나라에 갈 때는 그 언어를 배워갈 거라면서 따지기 시작했다. ㅎㅎ... 내가 여기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지나가는 여행자가 뭘 얼마나 배워서 가야 한단 말인가? 그러더니 내게 this is my country. not yours 라고 말했다. 손가락을 나를 강하게 가리키면서. 그때부터 난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라고만 답했고 그때쯤 직원이 내게 자리를 안내하려고 했다. 그러자 할망구는 영어로 무슨 말을 더 하더니 차이니즈 어쩌구 하면서 눈을 찢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화가 나서 그거 하지 마라. 너 지금 매우 rude 하고 인종차별이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할망구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더니, 됐고 자기 질문에 대답하라며 나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몇 마디를 더 했는데 프랑스식 영어 발음은 처음인 탓에 알아듣지 못했다. 할망구는 내가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걸 알아채자 oh, you don't even understand English? 하며 엄청 업신여기는 표정을 짓는 것이다. 나는 말문이 막혔고 시종일관 웃어 보이던 할망구는 더 환하게 웃으며 입고 있던 파란색 비싸 보이는 코트의 옷깃을 척 세우더니 가게를 나갔다. 나가면서 문을 열어주던 한 남자와 잠깐 대화를 했고 난 무척이나 모멸감과 당황스러움을 느낀 나머지 그 남자에게 대뜸 저 여자 방금 나한테 인종차별했고 눈 찢는 제스처까지 했다, 라며 횡설수설하게 말을 쏟아냈다. 할망구는 그런 나를 보더니 너 누구한테 말하는거냐며 이 남자는 나랑 대화 중이야, 한꺼번에 두 명이랑 얘기할 수는 없잖니?라고 끝까지 나를 쪽 주고는 사라졌다.
2020.06.01 추가)
위 내용은 사건에서 거의 닷새가 지나고 나서 쓴 글이기도 하고, 그 상황을 되짚기는 싫지만 그래도 의무감으로 기록하려고 쓴 일기이기 때문에 다른 일기보다도 감정을 덜 적은 것 같아 추가해본다.
교통 식비 기념품 등 모든 면에서 돈을 아꼈던 상황이라, 그 식당에 들어가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었다. 파리가 물가가 높기도 했고. 그 프랑스 가정식 식당은 점심 메뉴가 30유로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들어가기 전까지 문 앞에서 지갑을 열어보며 이걸 먹어도 괜찮은 것인가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리고 큰 맘먹고 들어간 것인데 들어가자마자 똥을 밟을 줄은 몰랐던 거지.
전에 영국에서도, 스페인에서도 소소하고 대응할 가치가 없는 인종차별(중국어로 말을 걸거나, 갑자기 꺼지라 욕을 하고 사라지거나, 기타 한국인/동양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담긴 질문을 받는 등)을 겪긴 했었다.
그래서 내가 동양인이라고 무시당한 것, 감히 나를 가르치려고 하고 끝까지 내게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제대로 맞받아치지 못했던 것, 기타 등등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 소소하게 나를 건드렸던 다른 인종차별 경험 등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생각이 나며 울음이 터져 나왔다. 식당 안에서 매우 추하게 끅끅댔다.
종업원은 나를 자리로 안내하며 너는 언제나 welcome이라고 나를 달랬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저히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던 나는 직원에게 사과를 하고 큰 소리로 끅끅거리며 식당을 도망치듯 나왔다. 분명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거지 같은 안개에 에펠탑이 반쯤 가려져도 기분이 좋았는데.. 분명 산뜻하게 시작했던 하루였는데 이런 식으로 망쳐져서 서러웠고 내가 동등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사무치게 억울했다. 에펠탑 바로 근처 벤치에 앉아 거의 30분을 끅끅거리며 울었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그 할망구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물이라도 뿌렸어야 하는 건데.
할망구가 우월감이 가득한 눈빛으로 내 일그러진 얼굴을 보면서 마치 동양인을 참교육 했다는 듯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코트의 옷깃을 세우던 그 장면이 자꾸 생각이 났다. 이렇게 받아쳤어야 하는데, 저렇게 대답했어야 하는데... 몇 마디의 말에 말려든 내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졌다. 이어서 좋아 보이는 할망구의 밝은 코발트블루 색 코트가 생각이 났고 오래되고 못생긴 아빠 패딩을 입고 있는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두꺼운 바지와 낡은 패딩을 입고 화장기 없는 푸석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던 것도 비참했다.
그 자리에서 30분은 계속 울다가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 내내 계속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모든 승객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숙소에 돌아오자 민박 직원이 왜 이렇게 일찍 왔냐고 물었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일찍 왔다고 대충 대답하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이 날은 맛있는 식사를 하고 루브르에도 가려고 했던 날이었다. 거지 같은 인간 때문에 계획이 다 망가져버렸다.
그렇게 그 날을 점심도 먹지 못하고 버려버린 뒤 다음날 점심까지 시간을 내다 버렸다.
17일
눈은 퉁퉁 부었고 더 이상 파리에 대한 궁금증이 남지 않았다.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영국에서 느꼈던 '이 약탈자 놈들..'이라는 불편함이 전보다 배로 커졌다. 점심시간이 다 되도록 숙소 라운지에 앉아 다음 행선지로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었다. 그때 새로 체크인한 어떤 여자분이 라운지로 들어왔고 숙소 사장님도 처음 뵙게 되었다. 솔직히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지금 와서 쓰려고 하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여자분과 사장님, 나 이렇게 셋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전 날 겪었던 일도 이야기하고 파리에 일어나고 있는 많은 일들, 인종차별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보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다. 사장님은 사이코를 만났다며 털어버리라고 했지만 별 거 아니라는 말투는 내가 듣기에 기분이 나빴고, 내 여행 방식과 태도에 대해 알고 나서는 자꾸 자네는 낭만이 없군, 이라며 경우 없는 소리를 하길래 그다음부터는 귀를 닫아버리게 되었다.
그 언니는(언니라고 하겠다) 오랜만에 파리에 다시 방문한 분이셨다. 그분은 가벼운 말투로 나를 위로하며 날이 좋으니 같이 나가자고 제안했다. 전 날 내가 찍었던 반 밖에 안 보이는 에펠탑 사진을 보여주자 깔깔 웃으며 꼭 같이 나가야겠다는 말도 했다. 맛있는 베트남 쌀국수집이 있으니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정말 일상적인 말인데 그게 그렇게 고맙고 산뜻할 수가 없었다. 어제 있던 일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일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제안을 받아들이고 언니가 외출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밀라노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아이글 아주르(Aigle Azur)라는 프랑스 지역항공사였다. 국제선인데 가격도 저렴했다. 이건 다음 포스팅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언니는 예쁜 원피스와 코트를 차려입고 나를 불렀다. 나는 아주 조금 들뜬 기분으로 언니를 따라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도착한 곳은 한 베트남 음식점이었다. 처음에는 뜨끈한 국물 쌀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메뉴판에 있는 볶음 쌀국수를 보니 또 그것이 먹고 싶어서 볶음으로 주문했다.
언니는 한국에서 나와 같은 지역에서 일하고 있었다. 내가 자취하고 학교를 다니고 있는 그 도시 안에는 특정 산업군이 밀집된 공단이 있는데 그중 이름 있는 곳에서 일하고 계셨다. 멋진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는 나도 이과생인 것에 반가워하며(?) 열심히 하라고 했다. 그리고 직장 얘기를 조금 해주셨다. 면접에서 들어오는 분들을 보면 합격할 것 같은 분들이 눈에 보인다고, 그리고 다들 잘한다고... 좋은 회사(언니가 다니고 있는 @@회사 같은)에 입사하는 것만으로도 은행에서 마이너스 통장을 개설해 준다며 직장이 중요하다는 얘기도 했다. 물론 내가 다니는 대학에 대해서는 별 얘기하지 않았다(ㅎㅎ).
언니랑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다시 에펠탑 쪽으로 이동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날씨였다.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언니는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별로 찍고 싶지 않았지만 데리고 나와준 것이 고맙고, 나도 텐션을 올려 보고 싶어서 최대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찍다 버릇하지 않아서 그런지 찍는 사진마다 별로였지만 최선을 다해보았다. 언니가 나보다 훨씬 더 잘 찍어서 나도 잘 찍어주고 싶었는데... 만족하셨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에펠탑 근처에서 사진을 엄청 찍고 나서, 다시 걸어 다니기 시작했다. 라뒤레가 있는 샹젤리제 거리 근처로 도보 이동하면서 수다를 많이 떨었다. 나는 지도를 켜놓고 걸으면서도 자꾸 다른 곳으로 가려고 하는 바람에 언니가 예전 기억을 더듬어 가며 나를 데리고 다닌 꼴이 되었다.
해가 지고 나서야 라뒤레에 도착했고,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나는 돈이 얼마 없어서, 그렇게 긴 줄을 기다리고도 초콜릿과 마카롱 한 개만을 샀다. 점심때도 그렇고 라뒤레에서도 그렇고 언니가 사주려고 했지만, 여행자는 각자가 내는 거라는 핑계로 두 번 다 사양했다. 우리는 그렇게 산 마카롱을 다른 커피 체인점에 가서 커피와 함께 먹었다. 처음에는 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먹고 있고 직원들이 따로 제지를 안 하는 것을 보고 그냥 함께 먹었다.
그렇게 앉아서 아픈 발바닥을 식히다 보니 해가 완전히 져 있었다. 그런데 카페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넓은 도로가 오토바이와 다른 자동차로 가득 차서, 엔진 소리를 내고 라이트를 깜빡거리고 있었다. 운전자들은 다들 야광 조끼를 입고 있었다. 경찰이 모이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뭐, 뭐지? 당황하고 있는 차에 언니가 아까 아침에 들었던 파업날이라며 사장님이 했던 말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제야 생각이 났고, 더 복잡해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자리를 떴다.
불미스러운 일은 다시 곱씹지 않는 이상 생각나지 않았다. 그게 너무 고마웠고 다행스러웠다. 그렇다고 파리에 대한 기대감과 호기심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낭만 같은 건 여행 직전에도 품은 적 없다. 그냥 의무감에 숙소를 나서고 미술관을 둘러볼 수 있는 약간의 의지 정도는 남게 되었다. 그러한 의무감으로 다음날 일찍 오르세 미술관에 다녀왔고 적당히 밥도 챙겨 먹었다. 하지만 전혀 인상적이지 않았다.